클레오파트라 여왕 이야기
이집트의 세 번째 여왕은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다. 그녀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후궁이 사는 알렉산드라의 호화로운 별채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에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여러 명의 공주들에게도 지어진 이름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식 이름이며, 우리가 아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이다. 사실 그녀는 순수한 이집트인의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혈통을 유지해 온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공주였다.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라지드법에 따라 15세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지배하는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필로 파토르'(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공동으로 이집트를 다스리는 도중에 여러 가지 권력의 암투로 권좌에서 잠시 밀려나 있었지만,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 온 로마 황제 카이사르와의 역사적인 만남 이후 그의 도움을 받게 되어 다시 한번 이집트의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많이 아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로마의 고귀하고 정숙한 부인 칼푸르니아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자주 클레오파트라를 가까이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의 집정관으로써 정복지의 여왕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리타니의 여왕을 정부로 삼았었다. 클레오파트라 또한 서로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 들어간 관계였으나 그가 가장 정념을 품은 대상이었다고 한다.
B.C. 47년 3월 27일 클레오파트라를 견제하고 제거를 하려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로마군과의 전쟁중에 전사하게 되었다. 이후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기원전 47~44년)와 22세의 미망인 클레오파트라는 재혼을 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완벽하게 이집트의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B.C. 47년 6월 23일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라고 이름 지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그를 케사 리온라고 불렀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 자신을 이시스-아프로디테이며 아들을 호루스-에로스로 정하여 그녀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의 금화를 주조하게 하였다. 그리고 테베 근처의 에르만트에 있는 사원의 벽에 클레오파트라가 아몬 신의 옆에 등장하고 신들이 신성한 아이의 탄생을 주관하는 장면을 그리도록 했다. 이러 사제들은 아몬라신이 카아사르의 형상으로 살아나 케사리온이 잉태되었다고 확언했다. 아이는 적자로 인정되었고 이집트적인 전통 역시 존중되었다.
그녀가 몇세기에 나올만한 만큼의 미모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며 지적으로 뛰어난 그녀를 만나 본 사람은 그녀의 매력에 사로 잡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다정하여 그녀가 말을 할 때면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가 없었다... 말할 때 드러나는 우아한 모습, 부드러움과 친절함 등으로 향취가 돋우어진 그녀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가시 같다."라고 디온 카시우스는 시인했다.
그리고 여러 언어들(에티오피아어, 아랍어,헤브루어,시리아어,메디아어,파티아어. 그리스 어등)에 능통하여 통역이 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언어적 능력으로 외교적인 협상 때 유리한 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는 여인들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그녀는 지적이고 우아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세련된 여왕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강력한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잡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 유다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으며, 이집트는 비록 로마의 속국이었으나 예전보다 더 큰 영토를 지배하게 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 또한 클레오파트라를 필요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대규모 동방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여왕이 로마의 편이 되어 군사적, 재정적 후견인이 된다면 수월하게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모했는데, 당시 파르티아 군대는 유대 땅 너머 로미 호민관이 통치하는 지역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로마의 오랜 적을 대파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필요와 이해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물론 클레오파트라의 육체적, 이성적 매력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예전에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사리온을 얻었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아이 3명이 태어났는데, 첫 번째는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알렉산더 헬리오스, 그리고 5살 터울의 막내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프이다.
안토니우스는 원래 풀비아라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와 '모방할 수 없는 삶(아미메토비온)이라 부르는 모임을 만들고 방탕하며 화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의 강력한 라이벌인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해 안토니아 마요르라는 딸을 가지고 있었으나 또다시 클레오파트라의 강력한 유혹과 매력에 빠져 결국 둘째 아이를 가지고 있던 옥타비아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와는 더욱더 사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점점 이집트를 옹호하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대립적인 위치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의 친한 친구들이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가게 되자 그의 비밀스런 유언장이 공개되고 말았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는 "케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신앞에 맹세했으며, 자기가 기른 이집트 여인의 자식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고 죽은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줄 것을 요구했다."라고 쓰여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로마 시민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여론조작과 더불어 죽어서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주라는 유언에 크게 분노하며, 안토니우스를 로마인이 아닌 이집트인이라고 칭하며, 그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장대한 선전포고식을 치르며 공개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탁월한 작전으로 단번에 안토니우스를 몰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상의 로마 권력구조의 변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 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죽기로 한 모임"을 만들고 옥타비아누스와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죽을 수 있는 독을 모두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은 일개 평민으로 살아도 되니 클레오파트라를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으나 완전히 묵살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여왕의 자리를 내놓고 안토니우스의 목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여왕 또한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불행은 쓰나미처럼 오는 것이니 안토니우스가 잘못된 정보로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칼로 자신을 해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심한 상처를 입은 안토니우스가 여왕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힘겹게 여왕의 능으로 가게 되었으나 여왕의 눈물과 한숨 속에 안토니우스는 어처구니없이 죽고 말았다.
이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일개 방탕한 이집트 여인으로만 보는 옥타비아누스와는 협상의 여지가 없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로마 승전 길에 클레오파트라를 포로로 데려가며. 그녀에게 여왕으로서 치욕적인 경험을 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더 이상의 삶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장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하고 스스로 자살하고 만다.
클레오 파트라의 자살에는 독사에 물렸다거나 독바늘에 찔렸다거나 독가스나 무화과와 연관이 있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독사에 물린 클레오파트라나 무화과 바구니가 떨어져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방을 그려서 자살을 묘사했다. 어떤 이들은 클레오파트라가 평소에 가장 고통이 없는 방법을 찾아서 노예들과 포로들을 테스트했으며, 그녀가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독을 가진 뱀을 이용하여 자살을 했다고 주장한다.
두 명의 강력한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애인 또는 남편으로 지내며 이집트를 지배했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강력하고 매혹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적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를 지켜갔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눈에 클레오파트라는 그저 근친상간 출신으로 로마의 남자를 유혹하는 이집트 여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자살로 더 이상 이집트는 이집트의 고유의 전통을 지킬 수 없었으며, 완벽하게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 파라오가 되어 이집트를 지배하였고, 4세기까지 로마 황제 파라오의 시대가 이어졌다. 이집트 문화와 그리스, 로마 문화가 융화되어 가는 시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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